보통의 한국 사람에게 ‘동양화나 동양화가’를 꼽아보라고 하면 어떤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올까? 조선 후기 유행했던 진경산수화나 김홍도, 신윤복 등의 익살스럽고 과감한 풍속화를 떠올리는 사람이 현대의 동양화가, 동양화 작품의 이름을 떠올리는 이들보다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다.

어느새 동양화는 교과서에서나 보는 그림이 되었고, 서양 작가들의 국내 전시는 한 시간 가까이 줄을 서야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성황이지만, 동양화, 한국화 전시에 시간을 내어 찾아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전통’을 ‘지루한 것’과 동의어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이런 편견을 뒤엎어줄 동양화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친근한 소재 선택, 판타지적 요소의 가미로 젊은 층의 눈을 사로잡는 동양화가 4인을 만나보겠다.

한복 입은 개미 요정, 신선미

한류열풍과 함께 한국의 전통복식, 공예에 대한 관심도 뜨거워지고 있다. 2011년 디자이너 캐롤리나 헤레라는 한복과 갓 재해석한 컬렉션을 선보였고 올해 초 에르메스에서는 조각보 프린트의 스카프를 내놓았으며, 넷플릭스 ‘킹덤’이 히트하면서 수많은 외국인들이 ‘저들이 매일같이 쓰고 있는 멋진 모자는 무엇이냐’며 호기심을 드러냈다. 미술계도 예외는 아니다. 동양화가부터 일러스트레이터까지, 한복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한국 전통의 미를 알리는 작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신선미 작가의 개미요정 시리즈(좌) 건망증 (우) 당신이 잠든 사이

신선미 작가는 한복 그림이 유행하기 전, 대학생 시절부터 꾸준히 한복 입은 인물을 그려왔다. 동양화 전공이었으니 어쩌면 인물화를 그리기 위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당시에는 ‘고리타분한 달력 그림같다’는 반응이 압도적이었다. 원나라 임인발이 그린 ‘장과견명화도’에 드러난 판타지적 요소를 보고 영감을 얻은 신 작가는 단아하게 앉아있는 모습 대신 생활하는 여성의 모습, 집안 구석구석을 숨어 다니는 개미를 의인화한 ‘개미 요정’들의 모습을 한복과 함께 화폭에 담기 시작한다.

아이와 함께 고지서를 정리하는 엄마, 서양식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하는 여성 등 현대의 생활양식을 반영한 그림을 꾸준히 발표해온 신선미 작가의 꿈은 “한국풍 그림의 대중화, 세계화”다. 작품집 ‘신선미의 한복 유희’를 영문으로도 출간한 것 역시 그런 이유에서다. 나중에는 해외에서 개인전을 열어보고 싶다는 신선미 작가의 다음 발걸음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수묵기법으로 표현된 스포츠카, 장재록

장재록, Another Landscape

수묵화는 먹의 번짐과 농담을 이용해 여백과 자연을 표현한다. 우리가 가장 자주 접하고 또 기억하는 수묵화의 소재는 매란국죽 혹은 자연의 경관일 것이다. 그런데 수묵화의 소재로는 아주 파격적인 것을 선택해 주목받은 동양화가가 있다. 평소 좋아하는 스포츠카를 수묵화 기법으로 그려낸 장재록 작가가 그 주인공이다. 언뜻 보면 흑백사진에 포토샵으로 효과를 준 것처럼 보이는 그의 자동차 연작은 몇 단계로 설정한 먹의 농도로 각기 다른 차종과 구도를 표현한 점이 놀랍다. 차체 표면과 유리에 비치는 주변 풍경까지 리얼하게 그려낸 점은 보는 이들의 즐거움을 더한다

장재록, Another Act

장재록 작가는 동양화에 대한 선입견을 부수는 작업을 최근까지 이어오고 있다. 오는 12월 22일까지 이응노 미술관에서 열리는 ‘산수-억압된 자연’에서는 4명의 한국 작가, 4 명의 중국 작가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데, 장재록 작가도 4인의 한국 작가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전통 산수화를 디지털 픽셀의 이미지로 해체한 장재록 작가의 ‘어나더 액트(Another Act)’는 산수화에서 사용하는 고원, 심원, 평원의 삼원법이 양자역학의 비가시적 세계에서 어떻게 무화 되는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어진 속 팝의 황제, 손동현

손동현, (좌) King (우)암흑지주다수배이다선생상

세 번째로 만나볼 손동현 작가는 해외 스타나 영화 속 인물들을 화폭 위로 초대한다. 손동현 작가는 임금이나 고관대작의 초상화가 담길 법한 구도에 배트맨, 슈렉, 다스베이더 등의 할리우드 영화 캐릭터를 배치했다. ‘영웅베투만선생상’, ‘암흑지주다수배이다선생상’ 등 그림 제목도 재미있다.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이 용상에 자신만만한 포즈로 앉아있는 그림의 제목은 군더더기 없이 ‘King’으로 끝난다. 버거킹, 아디다스 코카콜라 등의 로고는 팝아트의 한국화 버전 같은 느낌이다.

서울대 동양화과에 재학하는 동안 서양화과 수업도 듣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았지만 한국화가 가장 재미있었다는 손동현 작가는 <W>와의 인터뷰에서 “동양화라는 형식과 최신 대중문화라는 소재가 서로 충돌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또한 “그동안 동양화가 다뤄온 소재나 주제에 대중문화라는 주제를 들여와서 변용하거나 확장하는 걸 고민하는 것뿐”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동양화 작업에 대중문화적 요소를 끌어들인 이유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친숙한 내숭녀들, 김현정

김현정, (좌) 내숭: 마주한 현실 (우) 21세기 신풍속도: 정초풍정

2017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에서 선정한 ‘아시아에서 영향력 있는 30세 이하 30인’에 꼽힌 적이 있을 정도로 핫한 동양화가 중 한 사람인 김현정 작가 역시 신선미 작가처럼 한복 입은 현대 여성의 일상을 그려낸다. 허니버터칩과 초코파이가 어질러진 방에서 속치마에 잠옷 바지를 걸친 상태로 체중계에 올라간 여성, 신윤복의 ‘단오풍정’이 액자로 걸린 목욕탕에서 마스크팩을 붙인 채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두 친구 등 리얼하고 익살스러운, 현실적인 ‘내숭녀’들이 김현정 작가의 주인공이다.

김현정, (좌) 웰컴 투 시월드 (우) 결혼: 육아전쟁

20대 중반의 나이로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던 김현정 작가는 어느덧 30대가 되었다. 일상과 관심사가 달라지자 작품 속 여성의 모습들도 조금씩 변화한다. 결혼, 출산, 육아에 대한 작가 자신의 생각과 고민이 최근 작품인 ‘결혼: 웰컴 투 시월드’, ‘결혼: 육아전쟁’ 등에 담겼다 뭉크의 ‘절규’나 다비드의 ‘알프스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등 우리에게 익숙한 명화를 패러디한 점이 흥미롭다.

지금까지 독특한 소재와 관점으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동양화가 4인을 만나보았다. 진지하고 엄숙하게 전통기법을 고수하는 작업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동양화를 ‘즐기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어려운 현실이다. 다양한 소재와 자유로운 표현으로 동양화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동시에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는 이들 젊은 동양화가들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