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좋게 강변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하얀 빛으로 일렁이는 배의 형상이 나타난다면? 열에 아홉은 그 자리에 얼어붙거나 소리를 지르며 도망칠 것이다. 영화나 소설에나 나올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착각이다. 지난 한 달 동안 매주, 미국 필라델피아 델라웨어 강에 유령선이 출몰했기 때문이다. 목격자도 셀 수 없이 많다는 이 배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무섭지 않은 유령선?

10월 3일부터 11월 4일까지, 매주 수-일요일 저녁 7시부터 10시 사이의 델라웨어 강에는 하얀 유령 배가 나타났다. 배가 출현한 장소는 벤 프랭클린 다리 아래였는데, 레이스 스트리트 피어(Race Street Pier)를 거닐던 이들은 배의 왼쪽 면을, 근처의 콜럼버스 대로(Columbus Boulevard) 사람들은 뱃머리를 봤다는 소식이다.

그런데 이 유령배를 마주친 필라델피아 시민들의 반응은 조금 색달랐다. 겁을 내거나 도망치는 대신, 삼삼오오 무리를 이루어 배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거나 근처에 마련된 비어 가든에서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상기된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고, 두 눈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이들은 어째서 유령배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델라웨어 강변의 아트 프로젝트

사실 이 유령배는 델라웨어 강변 운영위원회(Delaware River Waterfront Corp’s)가 기획한 새로운 강변 아트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공공 설치 예술을 통해 델라웨어의 다양성과 문화를 탐색하는 이 프로그램은, 첫 번째 작품으로 이주의 역사를 재현하는 유령선을 만들어낸 것이다. 홀연히 나타났다 사라지는 모습 때문에 유령선이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 끔찍한 배 사고나 유령 이야기와는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유령선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홀로그램을 이용했을 거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전통적인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강물과 조명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강바닥에 분수 장치를 설치해 물줄기를 쏘아 올리고, 물 위의 플랫폼에 설치된 조명을 비춰 배의 형상을 완성한 것이다. 그날그날 날씨에 따라, 또 보는 각도에 따라 배의 모습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똑같은 배를 두 번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아트 큐레이터 라이언 스트랜드 그린버그의 작품

델라웨어 강변에서는 보통 불꽃놀이 같은, 세계 어느 강변에서나 볼 수 있는 행사가 열리곤 했다. 강변 운영위원회 구성원들은 강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동시에 새로운 방문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새로운 예술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델라웨어 시 커뮤니티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강물을 이용한 작품이라면 좋겠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큐레이션을 맡은 그린버그(좌)와 그가 참고한 바이앵글 스튜디오의 유령선 (우)

위원회는 이 프로젝트를 위한 적임자로 아트 큐레이터이자 포토그래퍼인 라이언 스트랜드 그린버그를 선택했다. 그린버그는 암스테르담 조명 축제에서 봤던 유령선을 떠올리며, 몇 가지 수정만 거치면 이번 아트 프로그램의 목적에 부합하는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유령선을 선보였던 바이앵글 스튜디오는 특정 기간에 특정한 배의 모습을 조명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하다고 조언해주었고, 그린버그는 그 길로 델라웨어 버전의 유령선 만들기에 착수했다.

도시의 과거, 현재의 강변에 떠오르다

그린버그와 운영위원회가 소재로 삼은 것은 18세기에 델라웨어를 드나들던 배들이다. 코코아 빈과 원유를 운반하던 17세기 배의 디테일도 조금 빌려왔다. 그린버그는 “이 시기는 도시의 발전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필라델피아 사회를 구성하는 데 일조했다.”고 밝힌 바 있다. 배를 통한 무역이 직물이나 철도 등 18,19 세기 주요 산업군의 발전, 그로 인한 인구 유입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운영위원회의 바람대로, 유령배의 출몰 기간 동안 델라웨어 강변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였다. 다들 이 새로운 방식의 예술 작품에 들뜬 모습이었다. 마침 할로윈 데이도 배의 출몰 기간 안에 있어, 유령선의 으스스한 분위기와 더없이 잘 어우러졌다. 강변 운영위원장 조 포킨은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사람들이 매일 저녁 강변을 찾아준다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는 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