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 견학이나 소풍, 사생대회가 아니면 굳이 들를 일이 없던 서울 시내 궁궐들이 최근 몇 년 새 핫플레이스로 거듭났다. 한시적으로 진행하는 야간개장은 낭만적인 데이트 코스로, 경복궁 한복 나들이는 친구들과 인생샷을 남길 수 있는 기회로 각광받는다. 지난 9월부터는 덕수궁에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현대 미술 전시까지 열리고 있어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기지 않는다는 소식이다. 고종황제 서거, 그리고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 덕수궁 관리소와 국립현대미술관이 함께 준비한 이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에서는 어떤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지, 미리 살짝 훔쳐보자.


밝은 빛들의 문

지난 9월 5일 시작해 내년 4월 5일까지 관람이 가능한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에서 작품을 선보이는 것은 5 개 현대 건축가 팀이다. 첫 번째로 소개할 ‘밝은 빛들의 문(Gate of Bright Lights)’은 태국에서 결성한 디자인&건축 듀오 스페이스 파퓰러(라라 레스메스, 프레드리크 헬베리)의 작품이다. ‘밝은 빛들의 문’이 설치된 장소는 다름 아닌 덕수궁의 광명문(光明門). 고종 황제가 대한 제국을 선포한 장소다. 일제가 궁의 본래 이름인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바꾸고 곳곳을 망가뜨리면서, 궁궐 한구석으로 밀려났다 80년 만인 올봄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작품은 스마트폰 화면을 연상케 하는 대형 LED 스크린의 형태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 광명문의 중앙 출입구에 위치한다. 이 문은 열렸다 닫힐 때마다 새로운 풍경을 관람객들에게 보여준다. 처음 문이 열렸을 때는 100년 전 궁궐의 모습 그대로를 볼 수 있지만, 조금 더 화려한 단청 무늬의 문이 나타났다 사라지면 관람객들은 온라인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1897년 고종이 새로운 국가를 선포한 이 자리에서, ‘밝은 빛들의 문’은 관람객들을 2019년의 새로운 세계인 디지털 화면 속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스페이스 파퓰러는 “소셜미디어나 웹사이트, 블로그 등을 통해 이제 누구나 자신만의 왕국을 통치하며, 디지털 세상의 플랫폼과 인터페이스를 통해 그 왕국을 대중에 열어 보인다.”며, 신중하게 고른 아이콘과 버튼, 링크, 피드, 세심한 장식적 요소로서의 컬러, 폰트, 레이아웃 그리고 그래픽을 전통 목조 건축물에 사용된 ‘단청’에 비유하기도 했다.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

함녕전 앞마당에서는 홍콩 건축가 CL3(윌리엄 림)의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를 만나볼 수 있다. 작가는 황실의 가마와 가구와 20세기 서구에서 실험되었던 가구의 형태를 조합해 6개의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켰다. 관람객들은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던 시기, 대한 제국의 과도기적 특성을 은유하는 이 작품들에 직접 앉아볼 수 있다.


대한영향 大韓宴享

궁중 잔치의 무대이기도 했던 덕수궁의 법전, 중화전 앞에서는 한국 건축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2018년 젊은 예술가상 건축부문에서 문체부 장관 표창을 받은 OBBA(이소정, 곽상준)의 ‘대한영향(大韓宴享)’이 그 주인공이다. 과거 연향 때 쓰였던 가림막을 오색 반사 필름으로 재현한 이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매 순간 다른 풍경을 선사한다.

미래의 고고학자

석조전 분수대 앞에 당도하면 미끄럼틀 형태의 ‘미래의 고고학자’에 올라가 볼 수 있다. 고고학의 출발은 ‘땅을 파는 행위’다. 2014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대만관 대표 작가인 ‘뷰로 스펙타큘러(히메네즈 라이)’는 땅을 파는 대신 3m 높이의 구조물을 만들어 덕수궁을 조망하게 함으로써 현재를 과거로, 미래를 현재로 치환했다. ‘기억된 미래(Unearthing future)’라는 전시 주제와 긴밀한 연관성을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원한 봄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마당에는 오브라 아키텍츠(제니퍼 리, 파블로 카스트로)의 초대형 온실 ‘영원한 봄’이 전시되어 있다. 폴리카보네이트를 활용한 투명창으로 빛을 끌어들여 봄처럼 따듯한 온도를 유지하는 이 작품은 ‘프라하의 봄(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 자유화 운동)’, ‘아랍의 봄(2010년 말 튀니지에서 시작해 아랍 중동 국가 및 북아프리카로 확산된 반정부 시위의 통칭)’ 등 변혁의 시도를 상징하는 동시에, 기후 변화에 따른 사회적 영향에도 화두를 던지고 있다.

‘덕수궁 프로젝트’가 열린 것은 올해로 세 번째다. 2012년에는 고종의 침전을 재현하고 중화전을 스크린 삼아 미디어 영상을 전시했으며, 2017년에는 ‘빛·소리·풍경’을 주제로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바 있다. 올 4월 문화재청은 국립현대미술관과 협약을 맺어 덕수궁 프로젝트를 정례화해 격년 개최하기로 했다. 2년에 한 번씩 가을이 오면 현대 미술과 만난 옛 궁궐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니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