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의 가장 큰 문제는 화재다. 전기차 배터리에 화재가 발생하면 밀폐구조로 인해 불을 끄기가 어렵다. 배터리 화재는 배터리 내 양극과 음극을 분리시키는 분리막의 손상으로 발생한다. 이 부분이 여러 이유로 손상되면 양극과 음극이 직접 맞닿아 화학반응이 발생하고 이로 인한 열이 급격히 증가해 화재로 이어진다. 이를 ‘열폭주 현상’이라 한다.

그래서 화재로부터 자유로운 전고체 배터리를 개발하려고 노력중이지만, 연구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상용화 되려면 2040년 이후가 될 것이라 전망될 정도다.

이러한 상황에 전고체 배터리를 대체할 새로운 개념으로 ‘바나듐 이온 배터리(VIB)’가 떠오르고 있다. 상용화 단계를 앞둘 만큼 상당한 발전을 이룬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과연 정체가 무엇일지 간단히 알아보자.

바나듐의 놀라운 범용성

바나듐은 200년 전 유럽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자동차 산업에선 100여 년 전부터 사용돼 왔다. 철에 탄소와 바나듐을 섞은 ‘바나듐강’이 대표적인데, 당시 미국 자동차 산업에서 사용하던 합금보다 3배 정도 ‘인장강도(당겼을 때 버티는 힘)’가 높아 인기가 많았다.

특히 바나듐은 연성(늘어나는 성질)과 전성(얇게 펴지는 성질)이 우수한데 잘 부러지지 않고 무른 성질까지 갖고 있어 차량용 부품 소재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내마모성이 강해 공구, 스프링, 제트엔진 등 여러 물건을 제작하는데도 활용될 정도였다.

바나듐은 산업용으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식용으로도 활용되어 왔다. 콜레스테롤 생산을 조절해, 동맥경화를 예방하며 인슐린을 흉내내 당뇨병 치료에도 효과가 있다.

ESS로 활용되는 바나듐 배터리

여러 활용서 덕분에 인기가 많았던 바나듐은 이제 전기차 배터리 소재로 주목받고 있다. 높은 효율, 안정성, 긴 수명이 장점이기 때문이다. 현재 바나듐을 활용한 배터리는 두 가지로 나뉜다.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VRFB)’와 ‘바나듐 이온 배터리(VIB)’다.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는 전자의 통로가 되는 전해액 성분에 바나듐이 함유되어 있는 형태다. 널리 사용되는 리튬이온 배터리와 비슷하게 화학 에너지를 전기에너지로 바꾸는 2차 전지로 분류된다.

이 배터리는 리튬이온배터리보다 덜 해롭고, 화학 반응성이나 화재 위험이 낮다. 그리고 배터리 수명을 20년 넘게 설정할 수 있고 전해액만 잘 교환하면 사실상 반영구적으로 쓸 수도 있다.

이러한 장점을 살려 발전소 내 전력저장장치(ESS)에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리튬 이온배터리보다 충전과 방전 효율이 낮고, 장치의 부피가 크며 비싸다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을 중심으로 리튬을 사용하지 않은 배터리, 즉 ‘비리튬계 배터리’를 사용하는 프로젝트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를 절반 이상 채택했고, 일본은 풍력과 같이 전력 공급량이 일정하지 않은 친환경 발전 시스템에 이 전지를 사용한 ESS를 발주한 바 있다.

한편 우리나라도 2020년 규제 샌드박스 형태로 ‘비리튬계 배터리’ 시장에 뛰어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고 울산에 실증 설비를 건설해 테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이 배터리 가격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바나듐 전해액을 반값으로 대량 양산하는 기술이 국내에서 개발돼, 비리튬계 배터리 시장에서 입지를 다질 것으로 전망된다.

차세대 바나듐 배터리 등장?

최근에는 바나듐 레독스 흐름전지의 단점을 개선한, 바나듐 이온 배터리가 주목받고 있다. 우리나라 카이스트와 미국 MIT 연구진이 세운 기업인 ‘스탠다드에너지’에서 7년 연구 끝에 이 배터리를 개발한 것이다.

바나듐 이온 배터리는 리튬 이온 배터리와 구조가 비슷하다. 전극이 존재하고, 바나듐을 갈아서 물에 넣은 전해액과 별도의 분리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장 큰 장점은 배터리에 충격이 가해져 손상되면, 배터리를 감싸는 전극 소재가 전해액을 붙잡아 화재위험을 낮춘다. 그리고 전해액이 물이기 때문에 드릴로 뚫어도 화재가 발생하지 않는다.

톤당 가격으로 맞추면 리튬이 훨씬 비싸다.

그밖에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재활용이 가능하고, 제조시간이 10분의 1밖에 안돼 경제성까지 우수하다. 배터리 효율의 경우 96%로 리튬이온 배터리보다 높거나 비슷한 수준이다. 또, 내구성도 10년이상으로 알려져있기도 하다.

하지만 리튬이온배터리보다 무겁고 부피가 큰 탓에 좀더 소형화 시키는 기술이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전기에너지를 함께 사용하는 하이브리드 대형 선박 동력 시스템이나 발전소 ESS, 급속충전기 등에는 이미 활용 가능한 수준이다.

실제로 아이오닉 5에 바나듐 이온 배터리로 만든 급속 충전기를 꽂아 충전하는 실험을 거친 바 있고, 롯데케미칼, 한국조선해양 등과 협업으로 기술 실증을 거치는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바나듐을 선택한 이유는 뭘까?

바나듐을 배터리 소재로 활용하게 된 계기는, 비교적 흔한 소재라, 공급과 수요를 맞추기 수월하기 땜누이다. 또, 바나듐 가격이 리튬보다 저렴한 것도 한 몫한다. 

바나듐은 원래 중국, 러시아, 남아공 등지가 원산지인데, 최근 우리나라의 티타늄 광산에서도 바나듐을 채취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광물을 선별하고 활용하는 기술력이 부족해 그동안 별도 가공 과정 없이 중국에 판매중이었다. 정부는 2018년부터 새로운 활용가치에 주목해 국내 매장량 지도를 제작 중이며, 채광 및 정제 기술을 개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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