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저는 잘 팔린다. 현대차에 대한 여러 생각을 내려놓고 냉철하게 봐도 잘 팔린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6세대 IG 모델을 출시 후 최상위권을 계속 유지했으며 페이스리프트 이후에도 현재 진행형이다. 심지어 파생모델인 하이브리드 모델은 순수 판매량으로 4천 대를 넘기며 국산차 중상위권에 오를 정도다.
보통 신차 효과가 3개월 이내로 끝나는 점을 고려하면 비상식적인 판매량이다.
그랜저는 국산차 치고 비싸다. 기본 3,392만 원부터 시작하며 3.3가솔린 풀옵션에 H 제뉴인 액세서리(과거 TUIX) 일부를 모두 더하면 제네시스 G80 값과 맞먹는 5,175만 원이다.
물론, 이만한 사양을 선택하는 소비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평균적으로 3천만 원 후반~4천만 원 중반 사이 가격대를 형성하는 그랜저이기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기 마련이다.
비싼데 왜 잘 팔리지?
그렇다. 과거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을 떠올려보면 아반떼가 베스트셀러였다. 그 당시 아반떼는 당연히 잘 팔릴 수밖에 없는 가성비 모델이었다.
근 20년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그랜저가 베스트셀러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을까? 국민 세단은 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명성&마케팅, 가격, 상품성 세 가지가 그랜저의 성공을 견인했다.
그랜저의 명성과 마케팅
그랜저의 명성은 이제 두말하면 입 아플 정도다. 제네시스가 있기에 프리미엄 세단 지위는 물려줬지만, 각 그랜저 이후 오랜 시간 ‘자수성가의 상징’으로서 ‘사장님 차’로 지내온 시간이 길었다. 때문에 50~60대 베이비 부머 세대는 그랜저의 향수가 아직 남아있다.
실제로 1세대 그랜저는 기업체 사장, 국회의원 등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이외 연령층은 부모를 통해 학습된 그랜저의 이미지가 있다. 또한 줄기차게 방영된 현대차 광고를 통해 ‘그랜저=성공’이라는 공식이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광고로 그랜저 TG ‘어떻게 지내냐는 친구의 말에 그랜저로 답했습니다.’가 있다.
이런 명성 덕분인지 구매 연령대는 점점 젊어지고 있다. 50~60대 구매 고객이 다수인 과거와 달리 요즘은 30~40대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현대차 통계에 따르면 더 뉴 그랜저의 3040 구매 비중은 약 50%다.
이는 페이스리프트 이전인 IG(6세대)의 3040 비율인 43%를 웃도는 수치다.
이에 대해 여러 이유가 존재하지만, 역시 마케팅 포인트를 어디에 두었는가가 핵심 변수로 작용했다.
1세대 그랜저는 그라나다를 훨씬 능가하는 대형 세단임을 강조했다. 당시 그라나다는 지금의 벤츠 S 클래스 수준으로 봐도 무방할 만큼 부의 상징이었다. 이후 출시된 그랜저는 그라나다만큼은 아니지만 부의 상징으로 보기에 충분한 가격대였다.
실제로 그 시절 1세대 그랜저는 80년대 말 강남 18평형 아파트 집값과 맞먹는 수준이었다. 그랜저의 가격은 1,690만 원으로 같은 시기 4년 대졸 초임인 12만 원을 거의 12년간 한 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할 만큼 비쌌다.
지금으로 치면 대졸 초임 평균 3,382만 원의 12년 치인 약 4억 원에 달하는 가치다. 물론, 이런 표현이 절대적일 수는 없지만 이만큼 비쌌다는 의미다. 즉, 주요 타깃층은 성공한 사업가와 고위 관료들로 한정되어 있었고 이에 알맞은 마케팅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랜저는 ‘성공’의 의미를 다시 묻는다. 금전 혹은 사회적으로 높은 곳에 오르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작은 카페를 차리는 것만으로도 삶의 여정 중 첫 성공이 될 수 있다. 혹은 꿈에 그리던 스트리머로서 성공해 유명해지는 것이 성공이 될지도 모른다.
이는 특정 계층만을 주요 고객층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전 연령을 아우르는 마케팅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라이프스타일이 세분화되면서 각자가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이 달라졌다.
그리고 현대차는 그랜저에 성공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대입시켜 주요 고객층을 광범위하게 가져갔다.
쉽게 말해 전통적인 자수성가에 해당하는 ‘성공’의 허들을 대폭 낮추자, 잠재 고객들이 그랜저로 너도 나도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프리미엄의 지위를 제네시스로 넘기지만, 그랜저의 네임 밸류는 그대로 유지하는 영리한 마케팅이다.
구매 허들이 생각보다
많이 낮아졌다
그랜저의 높은 판매량은 명성과 마케팅뿐만 아니라 가격적인 이유도 있다. 가격적인 허들이 낮아진 점도 한몫한다.
1세대 그랜저는 대졸 초임(월 12만 원)으로 12년을 모아야 했다.
3세대 그랜저(XG)는 대졸 초임(월 124만 원)을 2년 동안 저축해야 했다.
6세대 더 뉴 그랜저는 대졸 초임(월 281만 원)을 1년 동안 한 푼도 안 쓰면 된다.
물론 위의 내용은 현실적으로 집에서 생활비를 주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그리고 현실적인 월급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다. 어디까지나 위의 대졸 초임 기준은 ‘평균의 함정’이 작용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랜저의 가격 허들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확인 가능하다. 적어도 롤스로이스처럼 비싼 건 아니다.
위의 이유 외에 금융 할부 서비스 덕분에 상한선이 높아진 점 또한 그랜저 성공신화를 견인한다. 사실 이것이 ‘아반떼 대신 그랜저를 살 용기를 주는 원동력’이다.
미국신용상담협회(NFCC)에서는 보통 차를 살 때 전체 금액의 20%를 선수금으로 지불하고 남은 금액을 4년 이내 할부로 처리하기를 권장하고 있다. 그래야 금전적 부담이 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사뭇 다른 느낌이다. 60~72개월 할부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간혹 120개월 할부도 보인다. 여기에 선수금 없이 구매하는 경우도 있다.
그랜저 캘리그래피 모델을 구매한다 가정하면, 60개월 풀 할부 시 월마다 약 80만 원이 빠져나간다. 120개월은 60만 원 수준이다. 겉 보기에 자녀가 없는 부부이거나 미혼자일 경우 감당할 만한 수준으로 보이기 때문에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선택지로 떠오른다.
한편 바로 아래 모델인 쏘나타와의 가격 차이가 생각보다 크지 않아 쏘나타 고객층이 그랜저로 넘어간 것 또한 주요 요인이다.
게다가 선수금 지불 후 할부 처리를 하면 옵션 몇 개를 추가해도 월마다 부담해야 할 가격이 확 높아지지는 않는다. 즉, 그랜저의 엄청난 판매량 뒤에는 쏘나타 구매 예정이었던 잠재 고객 상당수가 넘어왔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제네시스 브랜드가 버티고 있는 한 그랜저는 지금의 포지션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현대차의 플래그십 모델이지만 가성비를 내려놓지 않는 ‘줄타기’를 계속할 것이라는 의미다. 사실 여러 요소를 고려하면 이만한 모델이 없는것도 사실이다.
결국 그랜저를 뛰어넘는 모델이 등장하지 않는 한 지금 같은 황금기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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